[구례여행-화엄사]국보와 보물로 가득찬

2014. 3. 20. 09:38ღ 전라남도여행 ღ/·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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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추천, 주말여행, 배낭여행, 자전거여행, 가족여행, 전라도여행]-2009년12월

화엄사 입구입니다.

지리산 구례....

산수유마을도 있고...온천도 있고...흑돼지도 있고...화엄사도 있고...섬진강도 있고..벗꽃도 있고...

유명한곳이 정말 많죠...정말 봄에 오면 딱인데요...그 때는 사람들이 버글버글....


화엄사 불이문


화엄사 대웅전(보물 299호)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큰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국보 제67호)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든 우물 천장이며, 삼존불 위쪽으로 장식적인 성격을 띠는 지붕 모형의 닫집을 놓아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겨울에 산사를 찾는 것도 나름 즐거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원융부동(圓融不動)의 무량법계
신라시대 이래로 지리산은 다섯 명산 중의 하나이며 천제를 지내던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그 산과 같이 광대한 법계처럼 느껴지는 화엄사로 가는 길에 잠시 멈추니, 구름너머 높고 장대한 연봉들과 물 건너 깊고 오묘한 골짜기들이 서로 조화롭게 틀고 휘어들며 사라진다. 각황전의 전신인 장육전을 초창했던 의상은 〈화엄경〉의 내용을 포섭한 〈법성게〉에서 “진성(眞性)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룬다(成)”라고 노래하였다. 예술과 종교는 진성의 인식을 미(美)로서 실천한다는 것으로는 동질의 의미이다. 그러나 때때로 철학적 사유에 의한 진리의 인식이 인간에게는 유효하나 예술에는 유효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 예술의 초월성을 느낀다. 화엄사는 그러한 예술의 초월성과 함께 화엄의 종풍을 건축으로 드러내어 원융무애한 화엄법계에 증입(證入)할 수 있게 한다.

빛도 없고 형상도 없는 존재
신라 진흥왕 5년에 창건되어 화엄종의 본산이었으며 후기에는 선교(禪敎)양종의 대본산이었던 사찰답지 않게 작은 담으로 가린 소담한 일주문을 통과하면 휘어진 길과 통로 양측의 수목들사이로 차례차례 드러내는 동적 장면이 있다. 그 시점의 끝에 있는 금강문을 나오면 수직의 석단들 위로 천왕문과 보제루까지 이어서 나타나게 하는 산지사찰의 점진적 유도방법을 보게 된다. 그러나 화엄사는 측면에서 사선방향으로 바라보게 하여 천왕문의 정면과 우측면, 그리고 다음 목표인 보제루까지 중첩해서 보이는 입체적이고 동적인 지각을 하도록 유도한다. 주불전의 중심 공간에 이르지 않고 부분만으로도 무한한 생명적 법성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화엄의 조형정신을 엿볼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좁았던 시야가 넓게 개방되면서 보제루만 보이는 것 같지만 왼편 상부의 사사자탑에서 시작하여 영산전과 각황전, 그리고 원래 지금보다 작고 멀리 있던 종각이 푸른 송림과 함께 종교적으로 승화된 천상세계의 건축인 듯 기대되는 상승 공간으로 시야에 펼쳐있다. 화엄경의 노사나품에는 항상 유전(流轉)하여 변하는 일체의 법은 부처님의 법신으로 불가사의하여 빛도 없고 형상도 없고 아무것에도 비교할 수 없으나 모든 세계는 여러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하듯 보제루 뒤로 펼쳐진 그 형상의 세계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불법을 설하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 누마루형식의 보제루를 돌아서면 탑과 석축 위의 건물들과 비로봉의 잡화엄식이 텅 빈 마당에서 극적인 반전을 하여 한눈에 파노라마로 전개된다. 눈앞에 펼쳐진 총상의 무한 장면은 인식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한정된 공간의 형상이나 빛도 아니다. 상즉상입의 연기의 존재와 같이 개별적인 별상은 “많은 덕을 포함한 하나”로서의 총상을 의지하고 있는 화엄사상의 무량법계이다. 높이 4m, 길이 100m 이상되는 장대한 석축은 상승공간으로서 다양한 건물군을 하나의 전체로서 조화되고 통일되게 하였고 각황전과 원통전 그리고 대웅전의 주 건물은 합각지붕으로, 주변건물은 맞배지붕으로 하여 주 불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동시에 서로 맞물리게 하였다. 또한 진입부에서처럼 건물들을 다른 각도로 틀어 각황전의 좌측면과 대웅전의 우측면까지 동시에 보이는 입체적이고 변화적인 배치를 하여, 시선의 흐름을 수평적 흐름에서 비로봉까지 수직적 상승으로 연결하여 화려하면서 우아한 위엄과 섬세하면서 당당한 기품의 시각적 조화와 공간적 연속감을 준다. 마치 화엄경 입법계품의 비로자나장엄장 누각처럼 “크고 화려하기가 허공과 같아 서로 장애되지도 않고 어지럽게 섞이지도 않는다. 선재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보듯 모든 곳에서 다 이와 같이 보았는바”, 이곳의 모든 건물은 생명적 원리의 조화를 전개하여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 속에 들어오는 무이(無二)의 법성을 표현한 법계가 되었다. 

모든 생명은 조화를 꿈꾼다
인조 8년(1630)에 중건된 대웅전과 숙종 29년(1703)에 중건된 각황전은 주불전인 대웅전의 중심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멀리 있으나, 또한 화엄종의 주존인 비라자나불을 봉안하고 있기에 더 큰 2층 건물의 1탑 배치처럼 지어서 조화와 대조를 동시에 표현하였다. 70년이나 늦게 세워졌음에도 각황전은 먼저 지어진 단층건물인 대웅전을 강조하여 느끼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나 모든 면에서 대웅전보다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비교된 절제를 통해 또 다시 화려한 별상을 취하고 있기에 각(覺)의 황(皇)으로서 부동하나 자유자재한 경계의 조화된 모습으로 있다.

모든 생명은 조화를 꿈꾼다.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조화롭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다. 본능적으로 조화는 작위적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가 배제된 것으로 개별화되기에 앞서 하나라는 생명의 본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개별성은 다의적으로 언표되며 서로 부딪혀 상충적 욕구들을 추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난 미의 상태에 다가가는 것이다. 조화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동일성의 발견이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나 서로 다르기만 하지도 않다”는 원효의 비일비이(非一非異)사상도 “다른 것과의 차이의 확인은 동일한 것을 해명한다”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도 결국 동일성에의 발견이다.

화엄사는 조화라는 추상적 진모(眞貌)를 형상의 충만함으로 선명한 세계를 펼친다. 조화에 있어 체계란 없다고 말하는 듯 이성적 비례나 서로가 대응되는 건축의 규칙들은 화엄으로 존재하여 쉽게 느낄 수 없다. 총상과 별상으로 구분 및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물들이 땅과 산과 하늘처럼 조응(照應)하고 화엄의 규칙들 속에서 수많은 움직임이 발견된다. 생명적 동일성 안에 다시 개별적 화엄이 자리하고 있는 각황전은 화엄미의 본질을 품고 있는 실체적 공간이다. 밖에선 2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그 높이를 짐작하기 힘든 고주들 사이로 사면의 고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근한 빛의 광휘는 공간과 합하여 단청의 색과 화하여 화해하는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시각과 청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닌 영혼에 의해 인식된 듯한 탈색되지 않을 광휘는 부처님의 반 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인간의 불안과 절실한 갈망들과 마주할 뿐 열정과 엄격은 없다. 그저 아름다움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미(美)는 신의 본성
미는 모든 생명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초월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내포하고 있다. 가르쳐 준 것이 아닌 생명체 스스로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미적 정화의 기능은 두려움에 취약한 모든 생명체들 간에 사랑과 연민을 자아내며 화엄의 대라천을 이룬다. 사랑과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감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정성으로 가꾼 꽃이 잘 자라듯이 사랑은 생식적 본능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조화롭고자 하는 자연의 욕구이다. 진정한 미는 신의 본성이라 한다. 그래서 인류는 아름다워야 하는 신의 본성과 조우할 수 있는 종교 공간을 그토록 아름답게 표현해 내고자 하였을까. 그리고 그 미의 공간에서 진성을 깨달으며 신성과 합한 존재이고자 하였던가. 화엄의 추구는 신성과 맞닿아 있다. 모든 존재가 구별없이 통합되는 원융이 화엄의 법성이듯 이 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화를 꿈꾸는 본래 고요한 자연적 사랑인 자비에 스스로 동화된다.












사진 아래에 보이는것이..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 300호)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널리 알리던 절로,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사상의 구현을 이루어 왔다. 신라 후기에는 승려 도선(道詵)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문종 때에는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어 일주문 밖에 큰 창고를 짓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7년 만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으며, 이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 서오층 석탑(보물133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있는 쌍탑 가운데 서편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동탑이 아무런 조각이 없는 반면 서탑에는 조각과 장식이 가득하다.

형태는 기단(基壇)은 2층이고, 그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워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각 층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1층 몸돌 4면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 배치하였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머리장식에는 2층의 단을 둔 받침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석탑의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8부중·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이나,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적멸보궁...설명 잘 나와있죠?^^
3층으로 만들어져 있고..
4마리 사자들이 감싸고 있다...
젊었을땐 몰랐는데..요즘은 여행가면..꼭 안내문등을 읽어 봅니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호남 제일의 사찰답게 많은 부속 건물과 화엄사 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 화엄사 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 제300호)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잘 보면...석탑 밑에도 사람?이 있고...석탑을 맞주보고...또 한 분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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