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여행-사의재]다산 정약용 유배되었을때 머물었던 주막

2014. 2. 26. 08:00ღ 전라남도여행 ღ/· 강진

[강진여행, 국내여행추천, 주말여행, 배낭여행, 자전거여행, 가족여행, 전라도여행]-2014년01월

 

게이버의 지식백과에 따르면...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는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과묵한 말씨·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2007년 10월 26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다산실학 성지(聖地)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강진읍 동성리의 옛터에 복원하였다. 대지면적 1,156㎡에 주막채·바깥채·초정(草亭) 등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지금도 주막으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추워서 그런지..평일이라 그런지..여행객들은 보이질 않습니다.

 

 

 

 

 

 

유배도 많이 다녔네요...너무 똑똑해도 예전이나 지금이나...크게 좋지 많은 않은듯 합니다.ㅋ

그냥 평범하게...

그래도 평범하게 산다게 쉬운게 아닌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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