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여행-진안역사박물관]용담댐 건설로 인한 이주민과 실향민을 달래다.

2014. 10. 8. 14:07ღ 전라북도여행 ღ/· 진안

728x90

진안여행-역사박물관[국내여행추천, 주말여행, 배낭여행, 자전거여행, 가족여행, 여행정보]2014년3

 

 

용담댐 건설로 인하여~ 많은 지역이 당연히 수몰되었고...

그로인해 원주민들의 이주는 당연하고~ 실향민들이 생겨놨다.

 

그걸 보상이라도 하듯...댐 주위에는 박물관들이 있다.

 

 

여기도...그런곳이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았는지...지금은 어떻게들 살고 계신지..궁금도하다.

 

 

 

 

 

 

 

일요일에 갔는데...다른 가족1팀만 있고..아무도 없다.

히터는 빵빵하게 돌아가고~

 

 

 

 

 

 

 

 

 

입구의 좌측부터 전시실이 시작된다.

제1전시실은 고고관.

 

 

 

 

용담댐 수몰지역에서 발굴된 선사, 고고유물을 전시한다. 선사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걸친 유물들을 통해 진안의 지나온 역사와
생활모습을 알 수 있다. 그래픽 패널과 영상물, 모형 등을 통해 진안의 자연환경과 지형, 지세 그리고 전반적 역사를 보여준다.
특히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지형 모형은 진안의 지리환경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이지역의 구석기, 신석기부터 해서... 용담지역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용을 담는 커다란 호수'라는 뜻을 가진 용담, 그 물속에 정말 용이 있을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는 유구한 역사의 흔적과 사람들이 꿈꾸던 전설, 수몰민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1전시실에서 밖으로 나와보니...상층이 훤히 보이게 시원하게~ 만들어 났는데..

벽에 걸린 마이산이 봄. 여름. 가을. 겨울별로....사진이 눈에 보인다.

 

 

 

 

 

 

 

 

 

 

 

 

 

 

 

 

 

제2전시실은 민속관.

 

 

 

 

[퍼옴자료]진안역사박물관

우리나라에서 고대부터 매사냥이 행해져 온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매의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이를 확대하여 내응방을 두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고유한 풍습이라 하여 금지당하였는데, 해방 후 다시 소생하였으나 현재는 거의 사라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안군 백운면 일대는 날짐승이 많고, 고원지대여서 많은 눈이 내리면 매의 먹이가 되는 꿩이 마을 가까이 몰려오는 까닭에 옛적부터 매사냥이 성행하였다.
백운면 출신의 전영태옹은 신복동 선생에게서 매사냥의 전통기법을 전수받은 후 50여 년이 넘도록 패각방울을 직접 제작하고 '시치미'를 알맞게 붙이는 등 전통 매꾼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퍼옴]진안역사박물관

 

진안은 고원지대(高原地帶)라는 지역적인 특성과 은둔지(隱遁地)로서의 사회적인 조건 등으로 인해 옛적부터 인삼 재배와 약초 채취가 성행하였다.
진안인삼은 백제인삼(百濟人蔘)의 맥을 이어 온 전남 화순의 동북과 금산의 인삼역사와 함께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말 일곱 분의 도인(道人)이 주천면 대불리 칠은이 골짜기에 은거하면서 야생 인삼의 씨를 심고 가꾸면서 인근 마을에 전파되었다고 전한다.
"옛날 용담군 이서면(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 운장산이란 명산이 있는데, 그 산록에 있는 산리(山里)라는 벽촌에 원모(元某)라는 사람과 칠거사(七居士)가 山神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그 곳에 살 곳을 정하고 선약(仙藥) 채취와 심신단련으로 일생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산삼(山蔘)과 지초(芝草)를 발견하여 돌밭을 일구어 이것을 재배하고 불로초(不老草)라 이름하였다"(한국인삼경작조합연합회, ≪韓國人蔘史≫, 1980)

 

 

 

 

 

 

 

2층으로 올라가 본다.

 

 

 

 

 

 

 

 

 

 

제3전시실로 기록관이다.

 

 

 

기록관답게....지도 및 서적으로 많이 채워져 있다.

 

 

 

 

드라마에서 본 웅치전투가 여기였다는거를 알았다.

 

국가를 지켜낸 호남, 호남을 지켜낸 진안 - 웅치전투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를 침입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음력 1592년 7월 8일 웅치(현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 신기마을 일대)에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힘으로써 전라도 침략을 막아낸 이 전투는 7년에 걸친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하게끔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진안에서 왜적을 막아낸 웅치(곰마루)전투가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는 멸망하였을 것입니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백사 이항복이 '전라도 웅치에서의 승리가 가장 컸고, 행주의 승리는 그 다음이다'라고 한 것처럼 웅치전투는 임진왜란 중 발발한 중요 전투 중 하나이다.

일본군은 서울로 진격하면서 군수물자의 보급을 위해 곡창지대인 호남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금산, 진안을 거쳐 전주부를 함락시키려 했으나 웅치에서 큰 피해를 입고 전주부 공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3일간에 걸쳐 전개된 이 전투는 임진전란사에 손꼽히는 대격전으로 웅치전투가 끝난 후 왜군은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에 감복하여 조선군의 유해를 모아 묻고 '조선국 충의 열사를 조문하다' 라는 표목을 세웠다.

 

 

 

 

 

 

4전시실 기획전시관

 

 

 

 

 

 

 

 

 

 

 

 

 

 

 

728x90
친구에게 글 보내기^,^;


TOP